그를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걸 애써 억누르고 다시 스푼으로 손을 가져갔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지.”
한참만에 먼저 입을 연 악시피트린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를 배웅하려고 람베르티도 따라 일어섰다.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조금 더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것이 아쉬워졌다. 사실 람베르티는 악시피트린이 다시는 자신을 찾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여서 그가 다시 찾아왔을 때, 고개를 끄덕인 순간에는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곧이어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람베르티의 마음에 걸렸다.
‘그러면 당신도 알게 될거야, 그 감정이 잘못된 것이라는걸.’
잘못된 감정이라고…
왠지 모를 조바심에 무리해서 다가선건 람베르티였지만, 그라고 걱정되지 않는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려고 애를 썼지만 비오는 날의 기억이나,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확실한건 그가 악시피트린에게 느끼는 감정이 있다는 것뿐이었다. 
처음엔 마치 꿈속에서 사랑하던 사람을 현실에서 마주한것과 같은 그런 감정이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악시피트린을 볼때마다 점점 현실로 다가오고, 큰 폭으로 깊어졌다. 잠시 잊고있었다가 다시 깨닫기라도 한것처럼.


 람베르티는 의뢰받은 브로치를 로체스트의 양품점에 전달하고, 장터에 들러 식료품을 사들곤 콜헨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전날 내린 비에 아직 땅이 눅눅했지만 볕이 좋은 날이었다. 천천히 숨을 들이쉬면 품에 안은 봉투에서 상큼한 사과향이 풀내음과 함께 섞여 올라왔다. 돌아온 그의 집은 나설 때와 마찬가지로 적막이 흘렀다. 탁자엔 간밤에 꺼내놓은 술잔이 놓인 채였다. 한쪽으로 대충 치운 뒤 짐을 올려두곤 잠시 망설이다 다시 집을 나섰다.
여관에서 악시피트린이 머물고 있다는 방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선 반응이 없었다. 못들은건가 싶어 조금 더 세게 두드려봐도 반응은 없었다. 그냥 발길을 돌리던 차에 이전에 본 적 있는 그의 동료와 마주쳤다. 팔에 부상을 입은 그 용병이었다. 상처는 괜찮냐고 건넨 말에 사내는 멀쩡하다는듯이 팔을 한번 들어보이곤 으쓱 했다. 혹시 악시피트린이 어디갔는지 아냐고 묻자 아직 자고있을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람베르티는 악시피트린이 일어나면 전해달라고 몇 마디 남기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약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잠이 별로 없다고 하지 않았나. 하긴 어제의 악시피트린은 긴 임무에서 돌아와 분명 피곤한 상태였을것이다. 그런데도 바로 찾아와주었던거겠지. 마지못해 받아들이는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 했었지만 먼저 찾아온것도 그렇고 말없이 떠난것에 대한 사과도 받았다. 조금 기대해도 되는걸까?


 얼마나 잔건지 눈을 뜨니 지는 햇볕이 따가워 악시피트린은 눈살을 찌푸렸다. 벌써 저녁인가. 평소엔 제대로 잠드는 것도 힘든 그에겐 드문 일이었다. 힘든 임무는 아니었지만 장기간 이어지다보니 몸이 지쳐있었던 모양이었다. 게다가 어제는… 정신적으로도 소모가 심한 날이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얼굴을 쓸어내리는데 건너편에서 대검의 날을 손질하던 랍토레스가 말을 걸었다.
“아저씨, 저기 그 누구냐, 세공사가 찾던데 가보지 그래.”
“여길 다녀갔나? 언제?”
“아까 낮에.”
“…그렇군. 다른 말은 없었고?”
“아니 딱히. 아, 당신이 단걸 좋아하냐고 묻던데.”


 대충 옷을 걸치고 세공사의 집 앞에 선 악시피트린이 두어번 문을 두드렸다. 안쪽에선 분주하게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뒤 문이 열리자 포근한 온기와 함께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다. 
“일어나셨네요.”
람베르티는 편한 셔츠차림으로, 단정하게 머리를 묶은채였다. 요리를 하던 중이었는지 그의 어깨 너머 냄비에서 무언가 끓는듯한 소리가 났다. 멀뚱히 서있는 악시피트린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하곤 냄비를 확인하러 돌아갔다.
“아까 찾아왔었다고 하던데.”
“네, 원래는 저것 때문이었는데요.” 
람베르티는 창가쪽을 가리켰다. 식히려고 꺼내둔 파이에서 고소하고 향긋한 향이 올라오고있었다.
“혹시 사과파이 좋아하시냐고 물어보려 했습니다. 일단 지금은 같이 식사를 하죠.”
람베르티의 말에 악시피트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짓자 급히 덧붙였다. 
“아… 아직 저녁 안드셨죠? 같이 드시겠어요? 물론 당신이 괜찮다면.”
악시피트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 메뉴는 호밀빵을 곁들인 토마토 스튜와 연어구이였다. 자신의 앞에 놓인 그릇에 가득 담긴 스튜를 한스푼 떠먹은 악시피트린은 ‘맛있군.’ 이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입에 맞는다니 다행입니다.”
“요리는 직접 하나?”
“거의요. 익숙한 편이에요. 어렸을때부터 해왔으니.”
어렸을때부터라… 쭉 혼자였던건가? 악시피트린은 궁금해졌지만 너무 사적인것같아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지켜보고있던 람베르티가 말했다.
“뭔가 알고싶은게 있다면 물어보세요. 그러기로 한거 아니었나요.”
“…계속 혼자였나?”
“어릴 땐 가족이 있었죠. 일도 아버지께 배웠고요. 지금은 저 혼자이지만. 당신은요?”
“나도 뭐.”
악시피트린은 덤덤하게 말했지만 그의 눈동자에 어떠한 감정이 스쳐가는걸 느낀 람베르티는 또 다시 그를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걸 애써 억누르고 다시 스푼으로 손을 가져갔다. 
“이전에는 사냥꾼이었다고 들었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할 줄 아는 것도 많지 않았고.”
“용병 일을 하고있는걸 보면 실력이 좋은가보네요.”
“딱히 그렇진 않은 것 같군.”
악시피트린은 수저를 덜걱이다 얼마전 랍토레스를 다치게한 일을 떠올리곤 씁쓸하게 대답했다.
“아직은 수련이 부족해.”
“활 쏘는 연습을 하시나요?”
“용병단 일로 나가있지 않을땐, 그래. 매일 훈련장에 나가지.”
열심이시네요, 라는 람베르티의 말에 악시피트린은 대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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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활은 아직 수리가 덜 끝났는데. 지금 바로 작업해드리겠습니다.”
식사를 마친 그릇을 정리하던 람베르티가 말했다.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데. “
“매일 훈련한다면서요. 급하게 필요할지도 모르는 일이고. 마무리 작업만 남았으니 잠깐 기다렸다 받아가시죠.”
“으음.”
‘얼마 안걸릴겁니다.’ 라고 말한 뒤 불을 켠 램프를 들고 이층으로 올라와 작업대에 앉으려는데 궁금했는지 악시피트린이 따라 올라왔다.
“저기 잠깐 앉아계세요.”
람베르티는 램프를 작업대에 내려놓고 창가쪽 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2층을 침실 겸 작업실로 쓰는군. 그가 작업대로 쓰는 공간은 생각보다 작았고 장비도 많아보이지는 않았다. 집밖에서 작업을 하거나 대장간에서 작업하는것이 종종 보였던것같은데 그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악시피트린은 고분고분 자리에 앉아 세공사가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알아채지 못했지만 세공사의 손은 그의 손보다도 많은 상처로 뒤덮여있었다. 저 상처들 중 하나는 저번에 활의 수리를 맡겼을 때에 생긴것이겠지. 람베르티가 매만지고있는 활은 이미 악시피트린이 보기엔 멀쩡하게 수리되어있었지만 람베르티는 성에 안찼는지 섬세하게 다듬기를 반복했다. 집중하느라 눈가에 힘이 들어간 모습이 제법 진지했다. 램프의 불빛이 비치는 그의 눈동자가 갓 딴 올리브색이라는것이 기억에 남을 때쯤 악시피트린은 그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들자 람베르티는 그를 향해 살짝 웃어 보였다.
“다 됐습니다.”
건네받은 활은 저번과 같이 새것처럼 말끔했다. 굳이 활시위를 당겨보지 않아도 되겠지. 앞장서 계단을 내려가며 파이를 좋아하냐고 묻는 람베르티의 질문에 악시피트린은 특별히 좋아하는건 아니지만 예의상 고개를 끄덕였다.
“챙겨드릴테니 동료와 나눠 드세요.”
활을 들지 않은 손에 사과파이를 담은 바구니를 건네며 람베르티가 말했다.
“언젠가 당신이 활 쏘는 모습도 보고싶네요.”
“그러지 않는게 좋을걸. 위험할텐데.”
“훈련하는 모습이라도 괜찮습니다. 작업하는데에도 도움이 될것같아서요.”
“생각해보지.”
악시피트린은 람베르티를 향해 인사하고 여관으로 돌아갔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이었지만 악시피트린은 훈련장에 갈 채비를 하려는 중이었다. 활을 기대어 세워놓은 탁자 위엔 그가 늘 잠들기 전에 마시던 술이 반쯤 남아있는 병과 어젯밤 람베르티가 챙겨준 사과파이와 화살통이 놓여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파이에서 계피향이 은은하게 올라왔다. 화살통에 손을 뻗으려다 무언가에 홀린 듯이 자리에 앉아서 파이를 한조각 집어들었다. 한입 베어물자 달콤하게 졸여진 사과가 입안 가득 씹혔다. 역시 맛있군. 어제의 식사도 그렇고 세공사는 요리에 능한 모양이었다. 파이를 반이나 먹어치우곤 나머지는 랍토레스의 몫으로 남겨놓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문득 탁자의 술병에 눈길이 닿았다.
술을 입에 댄게 언제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용병단 임무를 떠나기 전이었던가? 술이 없으면 잠을 못자던 그였는데.
악시피트린은 그저 자신이 피곤했던 탓이리라 짐작하곤 훈련장으로 떠났다.


악시피트린은 말이 그다지 많은 편이 아니었다. 주로 람베르티의 말을 듣고있거나 질문에 대답을 하는 정도였고 같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며 보냈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관찰하듯이. 그래서 악시피트린이 먼저 말을 꺼낸일은 람베르티로서는 의외였다.
“어떻게 그렇게 확고하지?”
“뭐에 대해서요?”
“당신의 감정에 대해서.”
어느 용병단 일이 한가한 오후, 악시피트린은 세공사의 집에 찾아와 이전에도 그랬던것과 같이 작업대 뒷편에 앉아 그가 일하는걸 지켜보고있었다. 람베르티는 작업하던 원석을 천천히 테이블에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확고해보인다니 다행이네요. …저도 혼란스러운 부분은 있습니다. 전부터 당신을 알고있었지만 어떻게 알게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던지. … …그때 제가 본건 당신이 맞았던거죠?”
자신이 눈물을 보였던 그 날을 얘기하는거라는걸 깨닫고 악시피트린은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도 당신을 만난적이 있는것같은데, 기억하려고 해봐도 떠오르는게 없어요. 제가 그냥 잊어버렸을리는 없을텐데.”
비오는날의 기억도 다시 떠오르기 전까지는 잊고있었다. 그 외의 기억도 아직 흐릿했다. 누군가 지워내려고 한것처럼.
“하지만 지금 제 앞에 당신이 있는건 확실하죠. 제 감정도 확실하고요. 그리고 제가 흔들리면 안되잖아요. 이 관계가 시작된 기초인데.”
그 말에 악시피트린의 미간이 좁혀지는걸 람베르티는 알아채지 못했다. 그 자신도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몰랐지만 람베르티 혼자서 겪어내게 하려고 그에게 온것은 아니었다.
“당신은… 당신의 감정이 반석인것처럼 말하지만 나는 당신의 위가 아닌 옆에있어.”
악시피트린의 입에서 천천히 흘러나온 말에 람베르티는 멈칫했다. 혼자 짊어지려 하지 마,
라고 들리는 그의 말에 람베르티는 머리를 얻어맞은듯 멍해졌다. 몇번이고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다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나온 말은 “고마워요” 가 전부였지만 그걸로 충분하다는걸 서로가 알고있었다.